
강원 고랭지 배추 재배 면적은 2024년 기준 전국의 약 93%를 차지할 만큼 압도적인 비중을 유지하고 있지만, 실제 농가 현장은 조금 다른 흐름을 보이고 있다. 기후변화로 여름철 기온이 높아지면서 무사마귀병, 뿌리혹병 같은 토양 병해가 잦아지고, 가격 변동성도 커졌다. 2025년 고랭지 감자 재배 면적은 전년보다 300ha 이상 줄었고, 배추 역시 연작 피해와 수급 불안을 반복하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일부 농가와 농협, 도 연구기관이 주목하는 작물들이 있다. 라디치오, 셀러리, 그리고 고랭지 사과다. 이 글은 세 작물이 왜 고랭지에서 의미가 있는지, 어떤 조건이 맞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현실적인 한계가 있는지를 함께 살펴본다.
이 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
- 고랭지 기후가 특정 작물에 유리한 이유
- 라디치오, 셀러리, 고랭지 사과 각각의 재배 조건과 소득 가능성
- 태백농협 현장 사례 등 실제로 검증된 내용
- 작물 전환 전에 먼저 확인해야 할 체크포인트
고랭지 기후가 오히려 유리한 이유
고랭지 농업이 어렵다는 말은 맞지만, 동시에 평지에서는 불가능한 작물이 잘 자라는 곳이기도 하다. 해발 450m 이상부터 1,200m까지 이어지는 강원 고랭지는 여름 평균기온이 20~23℃를 넘지 않는 지역이 많다. 이 서늘함 자체가 무기다.
여름철 고온에서 품질이 급격히 떨어지는 엽채류나, 더위에 색소가 파괴되는 작물들은 오히려 고랭지에서 경쟁력을 갖는다. 서울이나 경기 평지에서 여름 내 수입에 의존하던 채소들이 강원 고랭지에서는 노지 재배로 가능해지는 것이다. 또한 밤낮 기온 차가 크기 때문에 당도나 색택이 좋아지는 과수류에도 이 조건이 유리하게 작용한다.
라디치오 — 수입 의존도가 높은 틈새 채소
어떤 작물인가
라디치오는 이탈리아 원산의 치커리 일종으로, 붉은 잎과 흰 잎맥이 교차하는 독특한 외형을 가진 샐러드 채소다. 쓴맛이 있어 익히면 단맛이 올라오고, 호텔 레스토랑이나 고급 샐러드바에서 수요가 높다. 국내 소비량은 2010년 113톤에서 2020년 778톤으로 약 6.9배 늘었지만,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는 상황이다. 강원도농업기술원이 국산 대체 가능성을 연구해 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재배 조건과 수확 시기
라디치오는 고온에서 결구(잎이 오므라들어 속을 채우는 것)가 잘 되지 않는다. 기온이 서늘하게 내려가야 결구가 좋아지고 색도 선명해진다. 강원도농업기술원 연구에 따르면, 봄 작형은 고랭지(해발 800m 기준) 5월 상순 정식이 적합하고, 가을 작형은 7월 하순 정식이 권장된다. 정식 후 약 75일이면 수확이 가능하다. 준고랭지(해발 450m)와 고랭지(해발 800m) 모두 재배가 가능하지만, 작형에 따라 적합한 지대가 다르므로 자신의 밭 고도와 맞는 작형을 먼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소득 가능성과 한계
강원도농업기술원이 품종 '레오나르도' 기준으로 분석한 예상 총수입은 봄 작형 고랭지(해발 800m) 기준 10a(약 300평)당 약 646만 원, 가을 작형 준고랭지(해발 450m) 기준 약 448만 원 수준이다. 배추 가격이 폭락한 해에 비하면 안정적인 수준이지만, 아직 국내 유통망이 좁고 생산자 조직이 필요하다는 점이 한계다. 태백농협은 라디치오 공선회(공동 선별·출하 조직)를 구성해 호텔 납품 채널을 확보하고 있으며, 2025년 기준 8 농가가 약 8.7ha를 재배 중이다. 개인 농가 단독으로 판로를 뚫기보다는 조직화된 출하 채널 진입이 현실적이다.
셀러리 — 태백에서 이미 확인된 가능성
고랭지에서 셀러리가 유리한 이유
셀러리는 여름 평균기온이 23℃를 넘으면 품질이 떨어진다. 잎이 억세지고 섬유질이 강해지며 향이 쓴 방향으로 변한다. 반면 해발 600~800m 이상 고랭지에서는 생육 내내 서늘한 기온이 유지되기 때문에 섬유질이 부드럽고 향이 풍부한 셀러리를 생산할 수 있다. 봄에 파종해 8~10월에 수확하는 고랭지 재배는 평지에서 공급이 끊기는 한여름~초가을에 물량을 출하할 수 있다는 시장 타이밍 면에서도 유리하다.
태백 사례로 본 현실
강원 태백은 해발 700~1,200m 지대로, 여름에도 엽채류 생육에 적합한 기온이 유지된다. 태백농협은 셀러리를 전략 품목으로 지정하고 공선회를 구성해 2025년 기준 80 농가, 약 42.9ha 규모로 재배를 확대했다. 2024년 기준 셀러리 10kg 상품 한 상자의 경락 가는 3만 원대였는데, 같은 기간 배추 10kg 한 망이 1만 6천~2만 원이었다는 점과 비교하면 가격 면에서 눈에 띄는 차이가 있다. 태백농협은 산지유통센터(APC)에서 순회 수집·출하 방식으로 물류비를 줄이고, 저온저장고를 활용해 출하 시기를 분산한다. 이 유통 인프라 없이 개인이 시작하기는 어렵고, 따라서 지역 농협이나 영농조합과 연계할 수 있는지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
고랭지 사과 — 재배 한계선의 북상
사과가 고랭지로 올라오는 배경
사과는 연평균 기온 8~11℃, 생육기 평균기온 15~18℃ 정도를 필요로 한다. 과거에는 경북 대구·안동·예산이 주산지였지만, 지구 기온이 높아지면서 이 조건에 맞는 지역이 북상하거나 해발이 높아지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강원도의 사과 재배 면적은 최근 10년 사이 약 2배 가까이 늘었고, 정선·평창·횡성 등지에서 고랭지 사과 농장이 생기고 있다. 밤낮 기온 차가 크면 당도가 높아지고 색택(색이 드는 정도)이 좋아지기 때문에 상품성 면에서 고랭지 사과가 유리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진입 전에 따져볼 것들
사과는 초기 정식부터 첫 상품 출하까지 최소 4~5년이 걸리는 다년생 작물이다. 땅을 준비하고 묘목을 구입하는 데 드는 초기 투자 비용이 상당하며, 그 기간에는 다른 수입이 필요하다. 해발이 너무 높은 지역에서는 저온 피해 위험도 있어서, 사과 재배에 적합한 고도 범위와 품종 선택을 지역 농업기술센터와 먼저 상의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또한 사과 재배 인구가 증가하면 경쟁이 심화될 수 있어, 브랜드화나 직판 채널 구축 같은 차별화 전략도 함께 고민할 필요가 있다.
작물 전환 전에 먼저 확인할 것들
세 작물 모두 고랭지 기후와 맞는 측면이 있지만, 실제 도입 전에는 내 밭의 해발고도와 토양 조건이 대상 작물의 생육 적정 범위와 일치하는지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 라디치오와 셀러리는 작형별로 정식 시기가 다르고, 잘못된 시기에 심으면 결구가 안 되거나 추대(꽃대가 올라오는 현상)가 생겨 상품화 자체가 어려워진다. 강원도 내 시군 농업기술센터나 강원도농업기술원에서는 지대별 적정 정식기와 품종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므로, 이 채널을 먼저 활용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유통 문제는 재배 문제만큼 중요하다. 수확한 작물을 어디에 얼마에 팔 수 있는지, 지역 내 공선회나 농협 채널과 연계가 가능한지를 재배 계획과 동시에 확인해야 한다. 라디치오처럼 아직 시장이 좁은 작물은 판로 확보 없이 면적을 늘리면 오히려 손실이 커질 수 있다.
마치며
고랭지 배추와 무가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고랭지 농가에 작물 전환이 당장 필요하거나 모두에게 유리한 것은 아니다. 핵심은 자신의 밭 조건, 투자 가능한 규모, 연결 가능한 유통 채널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난 뒤에 작물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 소개한 세 작물은 그 검토 과정에서 하나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강원도농업기술원이나 지역 농업기술센터 상담을 병행하면 자신의 상황에 더 맞는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자주 묻는 질문
라디치오는 재배가 어렵지 않나요?
배추에 비해 관리 방법이 낯설어 처음에는 까다롭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특히 결구를 잘 만들기 위해서는 정식 시기를 지대별로 정확히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강원도농업기술원에서 품종별·지대별 정식기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있으므로, 이를 먼저 확인하고 소규모 시험 재배부터 시작하는 것을 권장합니다.
셀러리 재배는 어느 지역에서나 가능한가요?
셀러리는 여름 평균기온이 23℃ 이하인 지역에 적합합니다. 강원 고랭지와 준고랭지는 이 조건을 대부분 만족하지만, 해발이 낮아질수록 여름 고온 피해 위험이 높아집니다. 태백처럼 해발 700m 이상 지역이 안정적입니다.
고랭지 사과를 시작하려면 얼마가 필요한가요?
초기 비용은 지역, 부지 조건, 재배 방식(일반 재배 vs. 왜성대목 밀식 재배)에 따라 크게 다릅니다. 정확한 수치는 조건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지역 농업기술센터나 사과 관련 영농조합의 컨설팅을 통해 확인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다년생 작물이어서 수익 회수까지 시간이 걸린다는 점은 진입 전 반드시 고려해야 합니다.
이런 작물들에 대한 지원 사업이 있나요?
강원특별자치도는 고랭지채소 수급안정자금 조성, 병해충 방제 지원, 토양미생물제제 지원 등 다양한 지원 사업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대체작목 발굴과 경쟁력 있는 고소득 작목의 생산기반 확대도 도 차원에서 추진 중입니다. 구체적인 지원 품목과 조건은 시군 농업기술센터 또는 강원특별자치도 농정 부서에 문의하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